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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극과 극의 하루

by nspiceno1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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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진은 2022년 11월 23일. 9시 50분 경. 교토 아라시야마 역.

아마도 평생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날일 것이다. 

미리 설명해두자면, 저 뒷모습은 내가 곧 있을 불행을 1도 감지하지 못한, 신이 난 뒷모습니다.

 

나는 교토에서 보고 싶은 곳이 사실 아라시야마밖에 없었다.

청수사니 닌넨자카 산넨자카 액자정원 어쩌고... 

큰 감흥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오로니 나는 저기저저저저!! 아라시야마!

 

역에 도착했을 때, 비도 촉촉하게 내리는 게... 

우산은 귀찮지만 참 운치있고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서서 친구한테 사진도 좀 찍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개찰구를 나가려는 순간!!! 심장이 덜컹 했다.

서둘러 등가방을 내려놓고 큼지막한 배낭가방을 수색하며

"수정아 나 잠깐만!! 지갑이 없어!!" 을 다급하게 외쳤다.

"뭐라고!!!!?!!" 하며 다가오는 수정...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도 내심 큰 가방 어딘가에서 지갑이 굴러다니고 있을거라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하지만 셀카봉이니 노트니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다 끄집어냈을 때에도 나의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하... 시부랄. 정말 여기까지 와서 이러기냐.

'내가 왜 여행마다 가지고 다니던 지갑, 핸드폰용 크로스백을 여기에만 가져오지 않았을까.'

'왜 하필 오늘 주머니도 없는 레깅스를 입었을까'

'왜왜 하필 아빠가 출발할 때 준, 일본에서는 필요도 없는 오만원 짜리 두 개를 꾸역꾸역 지갑에 넣고 다녔을까'

 

그나마 한가지 위안은, 돈을 나눠 보관했다는 것.

지갑에는 약 오천엔 정도가 있었고, 가지고 나오지 않은 캐리어엔 삼만엔이 있었다.

 

수정이는 여행자 보험이며, 후기를 찾아보며 날 위해 희망적인 말들만 쏟아냈다.

"일본 사람들은 현금도 안 주워가. 찾을 수 있어."

"여행 후기 보니까 지갑 잃어버리고 찾았다는 사람들 많네, 힘내"

마음의 위한은 됐지만 사실... 진짜 슬펐다.

오천엔은 괜찮은데 아빠가 준 십만원을 잃어버린 게 슬펐고, 카드 재발급 받을 일이 갑갑했다.

 

개망연자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역에서 가까운 경찰서에 갔는데...

휴... 지갑분실에 무려 다섯명이나 뛰쳐나와 친절히 응대해준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친히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까지 전화로 연결시켜준다. (이건 진짜 감동이더라.)

나보다 한참 어려보니는 젊은 경찰관은 절망한 나에게 한국 야구 이야기를 꺼내며,

이승엽~ 오승환~ 이대호~ 한신타이거즈~~~ 하며 기분을 풀어준다.

30분간의 길고 긴 서류 작성이 끝나고(아, 물론 내가 한 건 아니지만) 경찰서를 나오며

'해 볼 건 다 해봤지 뭐' 하는 후련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은 시큰시큰 했다.

같은 실수를 30년 넘게 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내가 이런 기분으로 아라시야마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하필 도게츠교를 이런 기분으로... 흑흑...

 

 

괜히 나 때문에 기분도 못 내는 친구한테도 미안했다.

"그래도 지갑 잃어버린 게 휴대폰 잃어버린 것보단 낫지?" 정신승리하며, 

나름 티 안내고 열심히 사진 찍어주고 했는데 티 났겠지...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으려, 환승역 역무실로 갔다.

시원스쿨 일본어 1년차니까 나름 단어들은 튀어나오는데, 도저히 리스닝이 안 됐다.

결국 수정이의 구글 번역기로 대화를 하고 통화를 하는데...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친절한 역무원 아저씨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끝에, 나에게 이 종이를 쥐어주었다.

와.... 진짜요? 진짜라고요? '혼또? 혼또니??'

계속 물어봄... 진짜란다. 좀 가란다... ㅋㅋㅋㅋ

 

 

나는 아마도, 애초에 지하철을 탈 때부터 지갑따위 개나 줘버려~ 하고 흘렸던 것 같다.

한 손에 우산도 들었겠다...

 

가와라마치 역으로 가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갔는데 아니면 어쩌지??

매번 지갑 흘리고 다니는 주제에 의심은 또 많다.

 

결론은?

찾았다. 정말 이 순간 만큼은 '사랑해요 일본' 이었다.

갑자기 돈 번 기분. 세상이 다 내 것이 된 기분.

 

이 날이 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오전과 오후, 나의 상태가 완전히 극과 극이었기 때문이다.

오전엔 지갑을 흘린 처량한 관광객이었다가, 오후엔 도톤보리 글리코상 앞에서 환희를 느끼는 행복한 관광객이었다.

여기저기 검색 끝에 찾아간 와규집에선 술먹고 거의 울 지경을 '혼또니 오이시데스네!'를 외치고,

로손에서 만수르처럼 쇼핑도 했다.

 

제발 정신차리자, 싶으면서도...

또 이딴 정신머리 덕분에 저런 흔치 않은 경험도 해보지 싶고...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그래서 돌이켜봤을 때, 이번 오사카 여행이 나한텐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시간으로 남는 듯.

(생각도 참 많았고)

 

그래도 인간적으로!! 

지갑은 진짜 그만 잃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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