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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오만가지] 편의점 김선생님의 위로.

by nspiceno1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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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으로 넘어가는 겨울.

드라마 공모전을 준비하며 편의점 알바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오전 여덞시에서 오후 세 시까지 근무하는 아침 근무자였는데,

아침에 매장에 도착하면, 한껏 쳐진 눈꼬리 위로 투박한 뿔테 안경을 쓴 야간근무자 김선생님이 나와의 교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선생님이 '선생님'으로 불렸던 이유는, 다른 근무자들에 비해 지긋했던 나이탓도 있었지만, 혹자의 말에 의하면 '서울대출신'이라는, 적어도 이 안에서는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사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점잖은 말투와 적당한 유머, 투박한 안경만큼이나 고지식해보였던 외모는 김 선생님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소문에 담배 한 보루 정도의 신빙성은 더해주는 듯 했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혼자 근무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옆 가게 일식집의 젊은 남자 사장이 와서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택배를 보내려던 것이었는데, 당시 메뉴얼상으로 편의점에서 취급할 수 없는 물품이었다. 상당히 고가의 무엇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규정상 받을 수 없는 물품임을 안내했지만, 젊은 (그리고 싸가지 없는) 그 사장은 박스로 포장해서 물품명만 다른 것으로 기입하면 되는데 뭘 난리냐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않아서 참 다행이지만 이십대의 어렸던 내가 받아들이기에 참 힘든 말들은 내뱉었던 것 같다. 많은 손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치스럽다고 느꼈다.

점주님을 불렀나 어땠나. 상황이 종결되고, 나는 편의점 음료 냉장고 뒤에 들어가서 한참을 울었다. (이 때 알았다. 눈물은 따뜻한 편이니까, 쌀쌀한데서 더 잘 식혀진다는 사실을.)

 

개새끼.

옆집에, 그 일식집 비싸다지? 내가 돈 많이 벌어서, 거기가서 기필코 갑질을 하고만다.

 

나는 이 억울함을 다음날 아침에 만난 김선생님께 투정부리듯 털어놨다.

다시 생각하니까 또 울컥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려할 때, 김 선생님이 심드렁하게 말씀하셨다.

 

"김작가. 별거 아닌 일에 열 내지 마. 큰 일 할 사람이."

(선생님은 내 꿈이 작가라는 걸 알고, 줄곧 나를 김작가라고 불러주셨다.)

그리곤 흐느적흐느적 담배 진열장에 기대 무료하다는 듯 눈을 꿈벅꿈벅 거렸었던가.

 


 

오늘 나는, 참 힘든 하루를 보냈다.

뭐 때문에 힘든지, 그 실체를 글로 쓰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도 모를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러다 문득. 10년 전 김선생니의 한 마디가 떠오른 것이다.

 

나에게 모욕감을 준 사장의 일식집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흥해 강남 한 복판에서 장사 잘 해먹고 있고, 나는 그 날의 수치심과 분노를 너무 싹다 까먹어버린 탓에, 그 집 가서 갑질할 만큼의 돈이... 아직도 없다.

(시부랄. 생각보다 비싸더라 그 집. 복어집.)

 

별거 아닌일에 열 내지 마. 큰 일 할 사람이.

 

나는 과연. 큰 일을.

아니 어떤 일 하나라도. 잘 해낼 수 있을까?

문득 그 위로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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