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있었던 제 5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신인연기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정주리 감독의 <다음소희>.
정주리 감독, 하면 <도희야>. <도희야>하면 배두나. 나로서는 안 볼 이유가 없는 작품이었다.
다음 소희 Next Sohee (2023)
감독/각본 : 정주리
출연 : 김시은 배두나
로그라인 :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된 여고생 '소희'가 겪게 되는 사건과 이에 의문을 품는 여형사 '유진'의 이야기.
등장인물
○ 김소희 (김시은)
완주생명과학고등학교 3학년 학생. 대기업이라는 한국통신 S플러스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된 고등학생.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학교에서 추천해서 좋은 직장이라 믿고 현장실습을 나가기 전까지도 밝고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부조리를 보고도 무시해야 하고 인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실적을 쌓았음에도 현장 실습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급여를 받지 못하는 부당 대우로 인해 자해까지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려, 결국 저수지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 오유진 (배두나)
전북전주경찰서 형사2팀장(경감). 사건을 파헤치는 냉철하고 소신 있는 형사. 소희와는 연습실에서 잠깐 스쳐가듯이 만난 인연이었지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면서 소희가 겪었을 아픔에 공감하게 되고, 소희를 벼랑 끝까지 내몰은 사회와 제도, 현실에 분노한다.
이야기
특성화고등학교의 '애완동물과'에 재학중인 소희. 졸업을 앞두고, 담임의 소개로 콜센터에 취업하게 된다. 면접을 보고, 취업이 확정된 소희가 설레는 이유는 딱 하나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 보는 사람 허탈해질 정도이다.
"와 나 사무직 여직원 됐어!!!"
신나서 춤도 춘다.
취업이 아닌 족쇄.
소희는 몰랐지만, 현장실습계약서, 근로계약서 등을 작성한 순간, 소희는 세개의 굴레에 갇혀버리고 만다.'여기 대기업(사실은 대기업 하청의 하청에 불과하지만)이야! 무조건 버텨! 우리 반 취업률 꼴찌야!' 라고 하는 학교의 협박과'소희 오늘은 출근 안 하니? 아 휴가라고? 역시 대기업은 다르네...' 라고 하는 부모의 기대와그러나 정작 본인은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방관자적 위치. 그 세가지에 오롯이, 외롭게 갇혀버린다.
팀장님이 자살은 했지만, "여러분!! 우리 할 일 해야죠!! 콜 받아야죠, 얼른!!!"
소희가 힘든 와중에도 그나마 믿고 따르던 팀장이 자살한 후, 회사는 사건을 쉬쉬하기 바쁘다. 그리고 마치 이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 후임자가 와서 우왕좌왕하는 직원들에게 '콜 받아야죠!' 라며 협박하는데, 이 영화에 나온 그 어떤 대사보다 폭력적인 대사가 아니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희가 속한 부서는 콜센터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라는 '방어팀'. 그렇다면 도대체 뭘 방어하느냐?약정 해지하겠다는 고객들의 요구를 '방어'하는 팀이다. 그러니까 당장 이 상품을 해지하고 싶어 뿔이 난 대로 난 사람들의 바로 앞에 서서, 해지하고픈 마음까지 돌려놓고 새로운 상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소희는 팀장의 죽음 이후 독해진다. 콜을 있는대로 받고, 해지 요청 전화는 돌리고 돌리고, 이런저런 노하우를 꿀팁이라며 후배 직원들에게 자랑스레 떠벌리기도 한다. 소희도 어느정도 이 더럽고 치사하고 맥락없는 환경에 적응한 것으로 보였다.적어도, 그 달 금여 명세서를 받기 전까진.
"오바하지 마. 어차피 아무리 해도 200 못 벌어!!!"
소희는 모두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콜수를 채우고 실적 1위를 달성하지만, 그녀의 월급은 스스로가 계산한 급여에 한참 못 미친다. 이유는, 실습생이어서, 란다. 인센티브 또한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실습생에겐 당장 지급이 어렵다고 한다. 소희는 시궁창 속에서 자신의 노력이 모두 부질없었음을 깨닫게 되고, 팀장에게 대든다. 그러면 안 되지만 주먹까지 날리게 된다. 이로인해 무급휴가 3일이라는 징계를 받게 되는 소희.
세상에서 마지막 3일.
세상에서 보낸 소희의 마지막 3일은 사실상 이미 죽음, 그것도 지옥의 시작이었다.남들보기에 그저 치기어린 하극상에 불과한 소희의 주먹다짐으로 인해 학교에 컴플레인이 들어오고, 학교는 모든 비난의 화살을 소희에게 돌리는 것으로 모자라, 다시 회사에 돌아가 열심히 일할 것을 강요한다. 이대로 퇴사하면, 학교 취업률 떨어지니까.
"선생님! 제가 무슨 일 하는지 아세요?"
"콜센터에서 뭘 하겠어. 고객들 이야기 하는거 들어주고, 필요한 거 찾아주고..."
정말 현실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아니 알고도 모른척 하기 급급한 대화다.막막함에 자해도 하지만, 가족들은 그저 '얘가 왜 이러나' 할 뿐, 소희가 다시 회사로 돌아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소희는 돌아갈 곳이, 아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
소희는 추운 겨울날, 슬리퍼 차림으로 맥주 두 병을 마신 뒤, 너무나도 차가웠을 저수지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소희의 자살. 그리고 유진.
소희의 자살 사건을 담당하게 되는 경감 유진.
단순한 자살사건으로 사건을 종료하려던 유진은, 주변인들을 만나면 만날 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오후 8,9시가 되도록 늘 콜수를 채우기 위해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던 소희였지만, 회사는 그것을 '개인의 의지'라고 말한다.
'제가 무슨 일 하는지 아세요'라며 소희가 마지막 손을 뻗었던 학교는 '걔는 원래 보통이 아닌 애'라며 소희를 낙인 찍는다.
가장 곁에서 소희를 지켜봤던 가족들 역시 '걔는 그럴 애가 아니다, 우리를 생각했으면 이럴 수 없다.'라고 현실만 부정할 뿐이다.
한 아이의 애처로운 죽음을 그저 '이런 일'이락 표현하며 학교 예산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 교감 앞에서, 유진을 할 말을 잃고 펀치를 날린다. (이거 정말 통쾌했다.)
비율과 인센티브
사실상 너무나 많은 수치와 비율들이 소희를 괴롭혔다.
학교의 취업률, 학급의 취업률. 이런것들에 좌지우지 되는 학교 신입생 모집률.
가입해지방어율, 목표달성률, 그리고 잔인한 실적 나라비까지.
꽃다운 열아홉살 소녀는 얼마 되지 않는 인센티브를 위해 밤낮없이 달렸지만,
결국 그 인센티브는 개미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득권자들의 몫이었다.
학교도, 교육청도 '이런 일'로 자신들의 예산이 삭감되고 인센티브를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
정당한 대우를 받을 권리도, 그만둘 권리도 없는 그저 실습생.
극심한 감정 노동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수. 일은 그만두고 싶지만 그러기엔 학교가 말리고, 학교도 돌아간다 한들 10월까지 취업 못한, 학교 취업률에 똥칠하는 새끼들은 빨간명찰을 차고, 빨간 조끼를 입은 패배자일 뿐이다.
아래의 대화처럼.
- 학교는 왜 그만뒀어?
- 취업 나온 회사 그만두고 싶어서요.
- 근데 학교는 왜 그만뒀어.
- 학교에서 못 그만두게 해서요.
어쩌면 예견됐던 소희의 죽음을 말리지 못한 시스템을 질책하러 교육청에 찾아간 유진.
분노하는 유진에게 오히려 차분한 말투로. '일개 지방 교육청 장학사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말하는 장학사.
맞다. 이 거대한 제도와 시스템과 먹이사슬을 누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끊어낼 수 있었을까.
유진은 그저. 춤을 추며 행복해 하던 소희의 휴대폰 속 동연상을 보며 조용히 눈물짓고,
그렇게 영화는 끝을 맺는다.
감상
사실 이 이야기는,
이랬던 소희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도대체 뭘 하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사회 초년생들에게 사회는 참 잔인하다.
열심히 일하면 착취하고, 열심히 일 안 하면 '요즘 애들은 다 저런다'며 싸잡아 비난하고,
유투브니 BJ니 뭔가 하려고 하면 그것마저 '돈 편하게 벌려는 짓거리'라며 무시한다.
얼마 전, 이제 막 첫 회사에 입사한 누군가가,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건드려 퇴사 후 고발장을 받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잔인하다, 참.
이 세상의 기득권은, 어른이란 사람들은 이렇게밖에 후배들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일까.
서비스직에 오래 몸 담았던 사람으로서,
사람이 사람을 막 대하고도 죄책감을 모르는 부류들은, 제~발 어디가서 큰 벌 받고 본인도 똑같은 대접 받기를 바란다.
사람은 세뇌된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들도 그렇게 무의식 무의식 외쳐대는 거 아닌가.
나쁜말을 듣는 사람은, 본인을 나쁘게 생각할 수 밖에 없고, 그 사람의 결말은 결코 좋지 못할 것이다. 소희처럼.
정주리 감독의 영화는 잔잔하게 마음을 다 무숴놓는다.
<도희야>가 너무 좋아서 찾아봤을 때, 이창동 감독의 작품의 작업도 꽤나 오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
영화적으로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라면, 이 사회의 부조리와 잘못된 시스템을 낯낯이 까발리기 위해 '유진'이랑 캐릭터가 너무 소모적으로 사용된 점... 하지만 타이틀롤도 아닌데 뭐 어떤가. 충분히 영화 안에서 그 역할을 하고있다.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 추천.
정말 다음의 소희가 또 나오기 전에 무조건 추천.
<다음소희> 실제 사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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