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누군가가 나에게 또 다른 누군가를 소개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이 친구 정말 괜찮은 친구야. 장담해."
결과는 어땠을까?
그렇다. 나에겐 그 사람이 성에 차지 않는다. 아니, 성에 차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니 도대체 뭘 보고? 뭐가 괜찮다는 거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 책이 나에게 그랬다.
최근 읽게 된 어떤 에세이의 저자가 자신의 글에 이 책을 추천했다.
나에게 그 책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웃긴 건, 그 책은 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100프로 제목 때문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 다 읽고 나서도.
도대체 작가가 원하고 의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중반부 이후에는 대체로 건성건성 읽었다.
... 깊이 뒤얽힐술록 서로 성가시러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사람이든 집이든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내 생각엔 이게 전부다.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 옛날,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인생관. 그것을 너무 이야기 하고 싶었던 바람에,
앞 뒤로 신의 존재니 뭐니, 인간은 어떤 존재이니 구태여 살을 붙였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더라.
사실상 작가가 가정하는 상황이, 일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숱하게 일어나는 일들인가 싶기도 했다.
내겐 노력이 꼭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 기막힌 현실이 구원이다. 변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력과 성공의 불분명한 인과관계 속에서 세계는 내가 살아가기에 조금은 부드러운 곳이 되었다.
이건 정말 궤변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노력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라는 건 알겠다.
그렇기에 스스로 너무 자책하고 실의에 빠지지 말란 이야기란 것도 알겠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나? 어떻게 변명할 꺼리가 될 수 있을까?
그 변명이 정당화 된다면 애초에 그 노력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 아닐까?
노력과 성공의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면야 당연히 노력할 이유 또한 없어진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서 내일의 성공을 위해 다가가봤자 결국 결정은 신의 영역이며 인간의 발버둥 따위 결국 '소용없다'는 것 아닌가.
조금은 편하게 살라는 것인지, 노력하는 삶을 살란 것인지.
인정받는 삶을 살란 것인지, 실망시키는 삶을 살란 것인지,
혼자 살란건지, 관계를 맺으며 살란건지.
책장을 넘기면 넘길 수록 혼란스러워진다.
이 와중에 마음에 남는 문단 하나.
"우리는 가까이에 어울려 살아가더라도 바라보는 인생의 풍경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함부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넘겨짚지 말자고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타일러왔다.
상대방을 위해 나의 희생을 감수하며 수고한 일이더라도 그가 고마움을 모른다고 해서 서운해한다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럴수도 있음을 인식하며 미리 각오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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